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신태영(申泰英·특임·중장 예편·작고)장군은 큰아들과 막내인 5남을 포병에 바쳤다. 장남 신응균(申應均·특임·중장 예편·작고)장군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사죄하기 위해 이등병으로 입대해 나중에 장교로 특별 임관, 뒷날 군에서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포병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5남 신박균 하사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17세)로 포병학교에 자원 입대, 가평 전투에서 산화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만 해도 광복된 지 얼마 안된 창군 초기였기에 부자(父子)나 장인·사위가 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아들이 아버지보다 계급이 더 높은 과도기적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이를테면 제7사단장인 유재흥(劉載興·군영·중장 예편)장군은 전쟁 초기 제3사단장을 지낸 아버지 유승렬(劉昇烈·육사 8-1기·소장 예편·작고)장군보다 계급이 더 높았다. 전쟁 초기 청년방위대 수도 서울 고문단장인 안병범(安秉範·육사8-1기·준장 추서)대령과 안광호(安光鎬·특임·준장 예편)대령은 부자간에 계급이 같았다.
안광호 장군의 아버지 안병범(6·25 때 전사)장군과 유재흥 장군의 아버지 유승렬 장군, 그리고 신응균 장군의 아버지 신태영 장군은 모두 일본 육사 동기생(26기)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인 유재흥(일본 육사 55기)과 안광호는 소장·대령으로 계급 차이가 났지만 일본 육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자란 가까운 사이였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참전한 경우로는 전쟁 초기 제5사단장이었던 이응준(李應俊·군영·중장 예편·작고)장군과 제2사단장이었던 이형근(李亨根·군영·대장 예편·작고)장군, 역시 전쟁 초기에 총참모장을 지낸 채병덕(蔡秉德·군영·중장으로 전사)장군과 백홍석(白洪錫·육사8-1기·소장 예편)대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군대에서 ‘군번 1번’은 ‘선착순 1번’ 이상의 뜻은 없지만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통한 이형근 장군은 늘 이것을 강조하곤 했다.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인 채병덕 장군은 일제 시대 경기도 소사에 있는 조병창 창장을 지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 병기장교가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6·25를 맞이한 것은 본인과 국가를 위해 모두 불운한 선택이었다.
육군은 사단이 주력인데 채총장은 6·25전쟁 발발 1주일 전에 사단장을 전부 교체했다. 사실상 전군이 무방비 상태로 전쟁을 맞은 것이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에 처하게 만든 한강다리 폭파도 따지고 보면 지휘관인 채총장 책임이었다. 결국 채장군을 총장에 임명한 장관과 대통령의 잘못이 큰 셈이다.
이 밖에 형제가 참전한 경우로는 전쟁 초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白善燁·군영·대장 예편)대령과 제17연대장이었던 백인엽(白仁燁·군영·중장 예편)대령, 그리고 이응준 장군의 사위인 이형근 장군과 이상근(李尙根·육사1기·준장 추서)대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북 출신인 백선엽·인엽 형제는‘대한민국 군대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군인들이고, 이형근 장군은‘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했고 동생 이상근 대령은 6·25 때지뢰를 밟아 전사해 장군으로 추서됐다. |